만물이 깨기 전, 이 새벽 더없이 가을을 느낀다. 맞어! 봄, 그리고 여름의 새벽도 내겐 가을이었다. 가을엔 책 읽기에 너무나 좋은 계절이다. 성경을 펼치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아, 가을이구나. 가을에 즐겨 들었던 피아노가 있었지. 모리스 라벨의 Jeux d'eau(물의 희롱)이라는 곡이다. 마음을 추스르려 일기장을 잠시 펼쳤다.
여러분도 함께 이 곡을 들으며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
난 피아노를 못 친다. 연주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악보도 못 읽는다. 하지만 피아노 곡을 즐겨 듣는다. 한때 평생을 들을 것 같았던 피아노 독주곡도 몇 있었다. 피아노 건반이 뿜어내는 가을소리가 지친 삶을 몰아내고 기쁨의 충전을 주곤 했었다. 다 추억이다. 독일인 쿠르사바 교수가 세계센터의 파이프오르간 '큰 하늘'을 시연할 때 전율이 돋았었다. 음악이란 무엇일까? 찬양의 진정한 능력은? 음악에 스며들어 있는 힘은?
피아노의 건반 수는 88개다. 흰색이 52개, 검은색이 36개. 세계센터의 '큰 하늘'은 네 단의 건반과 발 건반이 있다. 허니 건반 수는 400여 개를 훨씬 넘는다. 이 모든 건반이 다 연주자에 의해 치여질까? 단 한 번도 소리를 내보지 못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 궁금함을 시무언이 먼저 언급했었다. 시무언 저서 중, 가장 힘들게 쓰셨다는 『무화과나무』에 나온다.
피아노는 길게는 100년을 쓸 수 있다. 사람처럼 한 세기다. 건반 중 10분의 1은 피아니스트의 손에 자주 닿지 않는다. 제작한 공장에서 나온 후 단 한 번도 소리를 내보지 못하는 것도 있다. 이 예화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냐에 따라 답이 다를 수 있다. 바이엘 상권만 치며 피아노 공부한 사람은 검은 검반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시무언이 말하려는 것은 이게 아니다.
그러나 그 피아노가 폐기되는 날까지 자기가 맡은 소리와 함께 그 위치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시무언이 강조하는 바는 이것이다. 한 번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건반이라도 역시 피아노의 일부요 피아노와 운명을 같이 한다. 피아노의 일생을 통해 단 한 번 소리를 내는 것도 있고, 매일 두들겨 맞으며 자기가 맡은 소리를 계속적으로 내야 하는 것도 있다.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피아노는 고전시대에 생겼을 때부터 건반이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며 현재까지 이르렀다. 곧 바흐나 모짜르트가 칠 때에는 지금보다 적은 수의 건반을 쳤었다. 이때를 실내악 피아노라고 한다. 이후 베토벤을 지나고 낭만시대에 이르러서야 지금 같은 콘서트 피아노가 완성되었다. 현대의 피아노 곡은 88개의 건반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피아노 건반이 자기를 치는 이가 없다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피아노 건반 중 잘 치지 않는 것은 빼버리자 한다면 그는 전문가가 아닌 초급자다. 시무언은 피아노를 교회로 여긴다. 피아노 건반을 교인 하나하나로 본다. 피아니스트를 목회자로 생각한다. 잘 쓰지 않는 건반을 빼버리자 하면 그게 피아노인가. 이와 같이 교인 하나하나를 다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어떻게 들어 쓰실지 알 수 없다. 어느 때 그 건반이 꼭 눌러져야 곡이 완성되는 것처럼 교인 하나하나가 그렇게 중요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던 사람을 쓰셨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일 때는 관심이 없으셨다. 미디언 초원의 보잘것없던 목동일 때 그를 출애굽의 선두에 맡기셨다. 기드온도 처음엔 패배의식이 강했다(삿 6:15). 제일 약하고 작았던 그를 하나님이 승리자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맨 왼쪽 건반의 '라'음은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불후의 명곡을 위해선 맨 오른쪽 건반의 '도'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지도 모른다.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하고 소중하지 않은 피아노 건반이 없다. 성도가 이와 똑같다. 모두가 끝없이 하나님의 관심을 끌며 기다리고 있다. 단 한 번의 쓰임일지라도 그분의 거룩한 터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