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때다. 익은 곡식을 거둘 그간 소망하던 때다. 신두리 사구에 여문 성락미(聖樂米)는 얼마나 알찰까? 높은 하늘이 황금 들판을 질시하겠지. 그래, 낫을 대자. 요즘이야 쌀을 낫으로 거두랴. 그래도 옴팡진 구석이나 논뙈기는 낫이 제격이다. 우리 낫이야 그리 크진 않다. 정겹다. 서양의 낫, 특히 양팔로 휘두르는 벌낫은 무서우리만치 크다.
신약성경에도 낫질이 나온다. 천국의 씨 뿌리는 비유(막4:9)에 나온다. 계시록에는 두 번의 낫질이 있다. “이한 낫을 가졌더라.”(계 14:11와 17) ‘이한 낫’은 한자로 ‘利한 낫’이다. 날카로운 낫이란 뜻.예리(銳利)하다 에서 온 말이다. 한 번은 곡식을 거둘 때 이한 낫을 휘둘렀다. 또 한 번은 포도송이를 거둘 때였다. 포도송이를 거둘 때의 낫은 큰 벌낫이 아닐까? 당신은 곡식인가 포도송이인가? 계시록 14장을 한 번 펴보라. 요엘서에도 있더라.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찌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하도다.”
시무언이 ‘낫 벼리기’를 말씀했다. “옛날 낫은 나무를 쳐내어도 부러지지 않았다. 이가 빠지지도 않았다. 무디어지면 대장간에서 벼리어 달라했다. 몇 번을 벼리어도 처음과 같았다. 잘 들었다. 그런데 요즘 낫은 쉽게 부러진다. 이도 잘 빠진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대장장이와 기계의 차이 때문이다. 쟁이의 세밀한 감각과 정성을 어찌 따라올 수 있겠나. 기계의 속도와 물량은 대단할 지라도. 낫 벼리기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무디어진 연장의 날을 불에 달구어 두드려서 날카롭게 만들다.’ 국어사전이 정의하는 벼리기다. 곧 벼리기란 날카롭게 하는 것인데 망치로 때리는 메질과 물에 담그는 담금질을 번갈아 진행한다. 핵심 비법은 담금질이다. 쟁이들은 잘 담금질한 날을 ‘살아 움직인다’고 표현한다. 살아 움직이는 명품과 잘 부러지는 불량품의 구별은 담금질에서 결정된다.
불에 달구고 물에 식히기를 거듭하면 쇠의 색깔이 예쁜 호박에 이른다. 이때 칼날은 순간적으로 담그고, 칼등은 천천히 담그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하면 칼날의 경도는 강해지고 칼등은 연해진다. 나무를 쳐내어도 충격을 칼등이 흡수해 부러지지 않는다. 유명한 대장장이들은 이런 벼리기 비법을 ‘칼날 위에 물방울 굴리기’라 부른다.
이처럼 낫 벼리기는 쇠칼의 각 부분에 따라 강도의 단계가 다르다. 칼날은 강해야 하지만 칼등은 연해야 한다. 시무언은 “훌륭한 신앙인이 되려면 신앙의 양육이 단계별로 온전히 진행되어야 한다.”는 설교에서 낫 벼리기를 말씀했다. “한 번에 칼날과 칼등을 담금질하면 모든 부분이 강해져 결국 부러지고 만다.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성령을 받도록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낫 벼리기를 잘 봐야 한다. 어떤 때는 강한 양육을, 어떤 때는 부드러운 가르침이 필요하다.”
명품의 신앙인, ‘살아 움직이는 칼’ 정도의 성도가 되어야 하리라. 그러려면 처음부터 그리고 단계별로 온전한 양육이 필요하다. 곧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처럼 믿을 때 회개하고, 또 침례를 받고 그 다음 성령을 모시는 각각의 단계를 온전히 진행해야 한다. 어느 단계를 뛰어넘어선 안된다. 억지 믿음은 회개를 낳을 수 없다. 억지 침례는 두려움의 불신을 낳는다.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에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곧 구원과 성령 받음을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이 임한 때도 각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미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혹은 회개할 때, 아니면 말씀을 들을 때나 안수를 받을 때 등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의 믿음과 순종의 정도에 따라 성령을 모시는 진행을 달리해야 한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고 그 다음 성령을 모심으로 성도가 된다.
우리 신앙은 하늘에서 허락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사람의 준비된 심령이 필요하다. 공장에서 뚝딱 만든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세밀하신 담금질로 만들어진다.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낫 벼리기로 만들어진다.
참조: 2009.05.17.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