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봤을 법하다. 필자도 밥상 크기만한 애들 그림책에서 봤다.
구 소련의 옛 동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큰 무를 발견했다. 아무리
힘을 써도 뽑을 수가 없었다. 키우던 개를 부른다. 고양이도 부른다.
힘센 소도 불렀지만 큰 무가 꼼짝도 않는다. 늘 천대꾸러기이던 새앙
쥐가 지나간다. 힘이나 쓸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생각에 부탁해
본다. 쥐가 땅 속으로 들어가 잔뿌리를 모두 갉아 먹는다. 그러자 집채
만한 큰 무가 쉽게 빠졌다는 이야기다.
보잘것없는 잡초로부터 키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뿌리가 생명의 끈이
다. 깊은 곳에서 빨아올린 물과 영양분을 100m 이상의 꼭대기에 있
는 잎까지 뿜어 올린다. 허니 뿌리가 잘 묻혀야 열매도 풍성하다. 성경
에도 씨 뿌리는 비유가 있지 않은가. 돌밭에 뿌려진 씨와 해 돋은 후
자라다 타버린 씨는 뿌리가 뻗질 못했다.
처음엔 곧고 굵은 뿌리부터 낸다. 그 다음은 많은 갈래로 여러 방향으로
잔뿌리가 뻗는다. 잔뿌리가 많으면 나무가 잘 묻힌 것이다. 억수와 강풍
에도 잘 견디는 나무는 잔뿌리 덕이다. 그래서 나무는 굵뿌리를 뻗은
다음에도 섬세하고 가는 잔뿌리를 계속 만들어 낸다. 물과 영양분을
최대한 많이 빨아들이려 함이다. 물을 흡수하는 힘도 뿌리보다 잔뿌리가
훨씬 더 세다. 또 흙 속에 있는 산소를 최대한 찾아내는 것도 잔뿌리의
능력이다.
잔뿌리가 중요하다. 영어로는 root hairs다. Hair/헤어/가 머리카락이란
뜻이니 참 실감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모교 대학에서 식물학을 가르
치는 동기가 잔뿌리를 이렇게 설명하더라. “잔뿌리와 굵뿌리는 다르다.
잔뿌리 끝에는 RHD-2라는 단백질이 있다. 뻗어나가는 곳에 장애물이
있으면 이 단백질이 신호를 보내어 ‘너를 감싸도 되겠니? 아니면 피해서
갈까? 그러면 어디로 갈까? 라는 의사타진을 한다. 이렇게 해서 흙을 꽉
움켜쥐기도 하고 화강암의 돌도 뚫기도 하며 이리저리로 수많은 갈래로
뻗는다. 만약 이것도 안되면 잔뿌리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서로를 의지
하고 꽉 붙잡아준다.”
시무언은 “나는 신령한 호흡으로 호흡하는 하는 하나님의 후사다!”라는
설교에서 잔뿌리에 대해 말했다. “잔뿌리가 물과 산소를 쫙쫙 빨아 당기듯
성경에 담긴 복을 신령하게 빨아당겨야 한다.”고 했다. 또 수상집에서는
“고향 하대마을의 초입에 넓은 그늘로 쉴 터를 제공하는 정자나무가 있다.
이 뿌리 깊은 큰 나무도 솜털 같은 가늘고 여린 잔뿌리에서 시작했다.”
며 “우리의 신앙생활도 천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잔뿌리 같은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주어진 직분이 작을 지라도 온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할 때 주께서 더 많은
것, 더 큰 것으로 맡기신다.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다.
에서도, 심지어 이 글을 읽는 우리 가운데에서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이
넘어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하나님은 과연 그랬다. 지극히 작은 일에
권리를 포기하면 하나님도 인정해버리신다. 예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한
자는 큰 일에도 충성한다”고 하신 것처럼 지극히 작은 일부터 하나님과
교제가 잘 되어야 한다. 지극히 작은 일부터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청이
있어야 한다. 작은 것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면 결과적으로 큰 것에서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고 했지 “큰 일에”가 아니라 말한다.
맞다. “작은 일”(마 25:21)이다. 그래서 잔뿌리가 중요하다. 개척은
잔뿌리가 한다. 캄캄하고 습하며 깊은 땅 속 환경이라도 예측불허의
토양이라도 개척할 수 있는 것은 잔뿌리의 힘이다.
시무언은 “하나님 앞에서 가꾸는 나의 잔뿌리는 정직과 겸손이다.”라고
했다. 시무언의 철학은 오늘보다 내일을 더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있다.
오늘을 바라보는 스올 같은 육신을 위함이 아니요 내일을 소망하는 낙원
같은 영혼을 소중히 여김에 있다.
참조: 2010.01.설교, 『내 평생에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