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들은 감을 신기해한다. 우리교회에 온 외국인연수생들에게 줘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열이면 열, 이게 뭐냐고 거듭 묻는다. 외국에는 감이 거의 자라지 않아 감을 본 적도, 맛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단것이 귀했던 옛날, 우리에게 감은 귀중한 과일이었다. 병충해가 있어도 나무가 튼튼히 자라는 감나무를 사랑해왔다.
익지 않아 단단하고 맛은 떫은 상태의 감을 땡감이라 부른다. 반면 색상이 홍(紅)이며 단맛인 감을 홍시라 부른다. 약간 손이 지저분해질 수 있지만 홍시의 맛은 굉장하다. 재작년이다. 강서 예배당의 할머니 집사 한 분이 냉장고에 얼려둔 홍시를 대심방 때 내놓으셨다. 홍시와는 또 다른 약간 들큼한 그 맛을 아직 잊을 수 없다.
또 있다. 감을 맛나게 먹는 또 다른 방법 말이다. 설익고 떫은 상태의 생감을 껍질을 잘 벗겨 볕과 풍이 좋은 곳에 말린 것, 곶감이다. 홍시나 단감과는 달리 곶감은 저장과 휴대가 편하다. 비상식량 중 이만한 영양과 휴대성을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까? 단감에서 느껴지는 와인의 첫 맛 같은 약간의 떫은 맛인 탄닌 성분까지 곶감에선 없어진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무언의 어린 시절이 이랬다. “골목에 누렇게 익어가는 땡감이 떨어진 것을 보면 냅다 주웠다.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한 입 베물러 꼭꼭 싶고 떫은 물을 내뱉고 꿀꺽 삼키곤 했었다. 그런데 거의 빈 속이지 않았겠나. 이걸 잘못 먹으니 오목가슴을 쇠갈고리로 찍어 당기는 것 같았다. 적어도 숨을 못 쉬게 하거나 혀에 마취주사라도 맞은 양 얼얼할 때가 많았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땡감을 먹으면 위험하다. 어떤 의사는 맛보다도 식도를 막는 위험이 있다고 한다. 때를 기다림이 필요하다. 인내심의 이치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허급지급 결과를 얻으려 하면 오히려 하지 않은 만 못할 때가 많다. 주를 위해 일할 때 응답이 오지 않거나 더디게 오는 것처럼 보여도 절망하거나 후회해선 안 된다. 기도의 결과가 미약하게 보여도 낙심하여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도 안 된다.
다윗은 7년 동안 쫓김과 방랑의 기다림을 견뎠다. 왕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놓치지 않았다. 왕이 된 직후, 그가 고백한 시편 37:7은 유명하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다윗은 불평을 몰랐다.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하나님의 역사는 정한 때에 이루어진다. 이를 가장 잘 알았던 선지자가 하박국이다(합 2:3). 유명한 그의 기도인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는 하나님의 응답이 올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표현이다. 즉 ‘땡감’을 먹지 않겠다는 결연의 간구다. 하박국에게 기다림은 응답의 다른 이름이었다.
더 있다. 모세는 미디언 들판에서 또 다른 40년을 기다렸다. 100세는 족히 넘겼을 법한 과부는 예수의 구속을 얼마나 기다렸나?(눅 2:37)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했지만 사도로 쓰임받기까지 3년을 더 기다렸다(갈 1:17). 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기다리시겠나?(눅 15장) 이 참에 지난 글인 (2)번 요이땅이나 (53)번 누에의 글도 함께 읽기를 권한다.
땡감을 먹고픈 유혹을 이겨내자. 기다리고 또 기다리자. 그 다음 풍성하고 맛나게 다가올 그 맛을 사모하자. 기다리는 동안, 고픔의 맛을 아는 자가 승리자다. 인내하는 동안, 설레임의 맛을 아는 자가 지혜자다. 예수를 비롯, 믿음의 선배들이 다 그러하지 않았나. 그들은 기다림의 기라성이었다. 그들은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롬 5:4) 알았다.
“땡감의 유혹을 이겨야 한다. 크리스천센터가 홍시가 되는 데는 40년이나 걸렸다. 그 전에는 땡감이었다. 땡감은 부족한 인내심이요 의심이요 불신이다.” 크리스천센터의 입당에 즈음하여 감사와 함께 전하신 시무언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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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이 땅!
여러분도 가을 아침 안개가 자욱하면 초등학교 시절의 운동회가 생각나나요? 흰 실내화를 신고 달리기를 준비하는 우리, 그리고 붉은 깃발을 머리 위로 올리던 선생님. 그 입에서 “요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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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누에
때가 있더라. 아주 긴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정말 그렇더라. 길게 살진 않았지만 목회자의 신분이라 그런 것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기다림의 참을성이 부족해 포기한 낙심의 그림자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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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내 평생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