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지는 부분을 우리말로 꿈치라 한다. 팔꿈치 하면 팔이 굽어지는 바깥쪽이고, 발꿈치는 발 뒤쪽의 굽은 부분 곧 발뒤꿈치를 말한다. 성경에 발꿈치에 관한 이야기는 세 가지다.
첫째는 역사 최초의 판결이라는 창세기 3장에서 뱀에게 내려지는 선고문에 기록되어 있다. “너(뱀)는 그(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뱀인 마귀가 여자의 후손인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반전이 이미 선고문의 앞부분에 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당하지만 결국 부활하시는 예수의 승리에 대한 계시를 기록하고 있다.
둘째는 시편 41편인데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요한복음13장은 이를 인용했지만 “나의 가까운 친구”라는 말은 뺐다. 곧 요한이 가룟 유다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세 번째는 야곱에 관한 거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이다. 리브가는 쌍둥이를 가지는데 태중에서부터 형제가 다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니나 다를까. 후둥이 야곱이 선둥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 게 아닌가. 이때부터 야곱은 그 이름대로 평생 동안 매사에 ‘발꿈치를 잡게’ 된다.
발꿈치를 잡는다는 말은 남을 속인다는 뜻도 있겠다. 축복기도를 받을 때 “자기가 에서라”하며 아버지를 속였고, 에서는 이때 “나를 속여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또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했다. 야곱의 발꿈치는 잡는 성격은 이후에도 계속 그를 골치 아프게 한다. 자기가 속일 뿐만 아니라 자기도 속임을 당하기도 하는데 심지어 자기 후손들도 그런 발꿈치 잡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시무언은 발꿈치를 잡는다는 것을 속임보다는 노력을 열심히 하는 아주 적극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야곱이 결혼할 때에도 조금만 참았다면 사랑했던 라헬을 자기 부인으로 맞을 수 있었는데, 너무 적극적이다 보니 마음에도 없는 레아와 하녀까지 모두 네 명의 부인을 맞게 된다. 또 20년 동안 발꿈치를 잡듯 재산을 모으느라고 갖은 애를 다 쓴다.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행여나 외삼촌에게 빼앗길까 봐 모든 소유를 가지고 밤에 몰래 도망 나오다 들켜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야곱은 계속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힘과 결심으로 살려고 애쓴 자였다. 이 말을 달리 하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려고 노력했던 아주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아마 성공과 돈 그리고 명예를 위해 살고 있는 현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처럼 바쁘게 살며 발꿈치를 잡듯 이것저것 잡으려는 오늘의 우리의 삶과 너무 비슷하다.
시무언의 설교에서 발꿈치가 중요한 것은 얍복강 가에서의 반전 때문이다. 얍복강 이전까지 야곱은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이것저것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얍복강 가에서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을 잡으려 한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잡으려 밤새 기도하는 명 장면이 창세기 32장이다. 31장까지는 세상의 복을 쥐어 짜내려고 자기 힘으로 노력했다면 32장부터는 드디어 하나님의 축복과 도움으로만 살려 간구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야곱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때부터 계속 자기 스스로 살려고 힘쓰며 몸부림치는 동안은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그러나 얍복강 가에서 마침내 야곱이 부르짖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깨시고 입을 여셨다. 무언가를 잡으려는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과 겨루어 상관하자는 ‘이스라엘’이라 칭하신 그것이다. 이제는 ‘야곱, 너의 힘과 너의 노력으로 살지 말고 나에게 간구하며 내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야곱일 때에는 침묵하시나 이스라엘일 때에는 그 침묵을 깨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것이다.
출처: 생수의 강 제2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