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지는 김포평야를 지날 때 아들이 질문한다. “아빠 참새가 전기줄에 앉아있는데 왜 안 죽어?” 감전을 무서워했던 어릴 적 나도 참 궁금했었다. 이 궁금함은 전기줄의 구조만 알면 이해가 된다. 단면이 보이도록 칼로 전기줄 가운데를 자른다. 전기가 오고 가는 두 줄 혹은 서너 줄의 도체가 보이고 그 밖을 각각 둘러싸고 있는 피복테이프와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PVC로 된 것이 보인다.
전기는 도체인 구리선으로 흐른다. 세 줄 혹은 네 줄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두 줄로 설명된다. 꽤 빠른 속도로 전기가 흐르는데 한쪽 선은 ‘가는 선’, 다른 한쪽은 ‘오는 선’이다. 곧 두 가지의 전류가 흐르도록 순환하는 구조로 된 것이 전기줄이다. 발전기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변압기를 통해서 가정에 들어가고 또 나간다. 이 순환의 서클이 끊어지면 전기는 통하지 않는다. 한쪽 선으로 전류가 흐르면 다른 한쪽 선으로 똑같은 양만큼 전류가 와야 한다.
그러니 전선이 한 개뿐이면 전기는 통하지 않는다. 감전이 되는 것도 전기가 몸 속을 통하기 때문이요 참새가 전기줄에 앉아도 감전이 되지 않는 것도 전기 순환이 참새의 몸 속에선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가 ‘들어오는’ 선이 있어도 전기가 ‘나가는’ 선이 끊기면 전류의 순환이 없기에 감전이나 전기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시무언은 이 전기줄을 우리 신앙과 비슷하다고 설명하신다.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데 그가 은혜와 복을 받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많이 받았다며 자랑하고 세어보기만 하거나, 또 어려움 가운데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치 않는 것은 어떤 심보일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한 시골에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난다. 목적지가 이들이 아니었지만 긍휼히 여기시고 병을 낫게 해주신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비천한 인생이었던 사마리아인만 엎드리어 사례한다. 이때 예수께서 질문하신 것이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이다. 사마리아인을 향한 질책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그 아홉을 향한 탄식이리라. 주님은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며 칭찬과 축복을 아끼지 않으셨다.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욱 넘쳐”라는 말씀이 기억난다. 베푸신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지만 감사를 돌림으로 은혜가 더욱 넘치는 체험을 우리들은 충분히 갖고 있다. 받은 것에 대해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드림으로 더욱 넘치는 체험을 가져야겠다. 주신 은혜에 대해 우리의 고백과 헌신을 뒤따르게 해 우리의 신앙이 죽은 신앙이 아니요 살아 역동하는 신앙이 되게 해야겠다. 마치 전기가 들어오지만 나가는 줄이 끊어지면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또 우리는 그로부터 받은 것을 고백하고 헌신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항상 끊기지 않게 해야겠다.
도둑질한 것이나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나 찬양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얻거나 누구로부터 받아야 감사가 되고 고마움이 나타난다. 사람에게 도둑질한 것이나 빼앗은 것도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십일조를 범함은 그 사람의 마음에 얼마나 악한 심보가 있는 지 다시금 느껴진다.
내일 새벽기도에 내게 있는 전기줄이 받기만하는 한 줄짜리 전기줄인지 확인해봐야겠다. 하나님께서 내 가정에 신령한 복을 주셨으면 우리 가정은 땅의 것으로 힘껏 하늘에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그분께서 베푸신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출처: 생수의 강 제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