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다. 사랑을 뜻한다. 이것 말고도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많다. 아가페, 에로스, 에피튜미아, 스톨게 등등. 철학이 발달했던 헬라의 철학자들이 사랑을 임의로 세분했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무조건적 사랑. 에로스는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 에피튜미아는 정욕이나 욕심. 스톨게는 모성애 같은 본능적 사랑. 필레오는 조건적인 사랑 정도. 머리가 아프다. 오히려 구별하는 것이 더 어렵겠다.
그냥 우리나라 말처럼 사랑이라는 한 단어만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런 구별이 오히려 어리석은 변론만 낳는 것 같다. 사실 예수는 사랑을 구별하여 말씀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예수 당시의 그 주변지역, 곧 팔레스타인 땅은 아람어를 썼기 때문이다. “달리다굼”이나 “에바다”가 아람어다. 아람어는 헬라어처럼 사랑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단어가 하나뿐이다. 더 민족적인 언어인 히브리어도 사랑이란 단어가 하나뿐이다.
이번 글의 시작은 이거다. 요한복음 21장이다. 예수의 질문 말이다.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베드로에게 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도 세 번이나 똑같다.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사랑이란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왔다. 시무언은 이에 관한 설교를 하며 눈물을 참으셨다. 필레오 때문이었다. 베드로의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원어로 읽으면 순서가 이렇다. 1) 아가페하느냐? → 필레오합니다. 2) 아가페하느냐? → 필레오합니다. 3) 필레오하느냐? → 필레오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세 번 모두 ‘필레오의 사랑합니다’ 였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은 아가페일까? 필레오일까?
시무언은 필레오를 이렇게 정의한다. “필레오는 선택적이고 고집적이다. 한 대상만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다.” 사랑 중 최고의 사랑으로 알고 있다. 한 대상만을 향한 것이니 최고의 존경은 물론이다. 시무언은 이렇게 까지 말한다. “피가 끓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하는 사랑이 필레오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사랑이다.”
필레오가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아가페는 부모의 자식사랑이다. 선택적이지 않고 무조건적이며 자발적 사랑이다. “아가페란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다.” 곧 아가페는 차별이 없다. 원수라도 내 몸같이 사랑한다. 자식이 여럿이면 부챗살 모양으로 퍼져나는 그런 사랑이다. 이는 부모만을 향한 화살표 모양의 필레오와는 다르다. 우리 속담인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가 아가페의 사랑이다.
이제 음미해보라.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모든 것을 다 아심에도 질문하신 그 의도를. 세 번째 대답에서 베드로는 “근심하여” 대답했다. 이 근심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그 사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어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는 말을 덧붙인다. 곧 ‘저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미 필레오 한다고 말씀 드렸고 이를 아시지 않습니까’라는 의미다.
시무언은 세 번째 대답을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이 장면을 연극 각본으로 만든다면 베드로는 눈물을 아주 많이 쏟았을 것이다. ‘주님만을 위해 온 맘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필레오하느냐 물으시니….’하며 통곡했을 것이다.” 이처럼 필레오에 대한 시무언의 해석은 고귀하고 깊다.
헌신과 충성의 절정! 베드로의 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설교자가 눈물까지 참으며 설교한 그 마음도 엿볼 수 있었다. 허나 기존 신학에선 필레오보단 아가페를 더 높인다. 신앙보단 철학적 사고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필레오를 ‘저는 당신을 아가페의 수준에서 사랑하지 못합니다. 삼 년 간 당신을 쫓은 제자의 수준까지만 사랑합니다.’라고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