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나 차 같은 음료를 담는 작은 그릇을 말한다. 원래는 손잡이와 받침이 있어야 잔(盞)이다. 위가 넓적하고 높이가 낮으면 대신 배(盃)란 말을 쓴다. 잔도 배도 뚜껑이 없다. 영어로는 둘 다 컵(cup)을 쓴다. 일상에선 잔보단 컵이란 말을 더 쓰는 듯하다. 우리 조상들은 신석기시대부터 토기 잔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가 그냥 뚝딱 된 기술이 아니다.
성경에도 잔 이야기가 나온다. 보통 세 가지를 기억한다. 다들 외우고 있는 시편 23편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하신 마지막 만찬 때의 잔. 이때 잔을 가져다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복음 14:24)고 하셨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하셨다.
시편 23편의 잔은 승리의 잔이다. 전쟁을 마치고 승리의 깃발을 가지고 온 장수에게 왕이 부어주는 상공(賞功)의 잔이다. 그것도 원수의 목전에서 자랑하듯 말이다. 우리 신앙인의 마지막도 이랬으면 좋겠다. 왕의 왕이신 주님으로부터 잔이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은혜와 칭찬을 받기를 소원한다.
반면 마지막 만찬의 잔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잔은 결행(決行)의 잔이다. 전쟁터에 막 나가려는 장수를 왕이 불러 마지막 따라주는 최후의 잔이다. 이 잔을 마시며 장수는 죽음을 각오한다.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약속을 왕께 다짐한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사약(賜藥)을 마시는 것과 진배가 없는 셈이다. 잔을 마신 장수는 이미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다.
더 찾아보면 잔이 진노를 상징하기도 한다.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이사야 51:22). 요한계시록에도 진노의 잔, 그리고 잔보다 큰 진노의 대접도 나온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리니”(24:10).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16:19).
시무언이 보는 잔은 죽음이다. 죽음을 맛보는 수준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죽임을 당하는 정도다. 그것도 피를 흘리는 죽음이다. “잔을 마시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에게 잔은 피를 흘리는 것이다. 곧 자신이 죽으시는 것이지만 이는 인류를 살리는 것이다. 잔을 주님이 마시지 않으시면 인류는 절망일 수밖에
없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주님의 보배로운 피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예수께서 잔을 받으셨다. 이 잔은 인자에게 그리스도의 직분을 주어 죽임을 당하게 하는 그 잔이다. 본래 인자로서 죽음을 맛보려고 하셨지만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도로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만찬 때의 잔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최후의 잔을 이때 받으신 것이다(마태복음 26:7).”
그럼 우리도 잔을 마셔야 할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하늘나라에서
두 아들이 주의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때 주님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마태복음 20:22) 하셨다. 제자들은 “할 수 있나이다”고 했다. 곧 ‘죽을 수 있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제자들도 잔을 마실 수야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직분의 잔을 마셨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 보혈의 잔을 마셔야 한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애쓰신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 하신 것은 자신이 죽으시기 싫다는 말이 아니다. 또 인류를 버리시겠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인자가 반드시 이 잔을 마시지 않고서는 다른 일체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참조: 2007.11.설교, 『사복음서 원어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