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분 중에 사진찍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있다.
여가로 하시는데 프로 뺨치는 솜씨다. 아직 기억이 생생하다.
“사진도 창조다.”라며 사진에 대한 웅숭깊음을 말씀하셨다. 뺄셈의 예술이 사진이란다.
여백 속에도 작가의 무한한 자유와 소담한 뜻이 담겨있다고 하셨다.
멋진 장면을 발견해도 사진 렌즈에 우선 담아봐야 안다.
빛과 그림자의 현란한 자태를 일단 렌즈로 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다음 앵글과 조리개를 조절해 불필요한 것을 없애거나 흐리게처리한다.
그리곤 찍는다. 깎고 다듬고 지우고 흐리게 하는 능력이 사진의 창조력이다.
반면 그림은 흰 캔버스가 시작이다. 점을 찍는다.
잠깐!
이 점 하나 찍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글쟁이라면 첫 화두를 뭐로 하느냐는 여간 고민에 휩싸이는 것처럼. 그냥 막 찍으면 쉽겠지.
그러나 자존심 걸만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고민은 굉장히 깊어진다.
다른 점과의 조화, 꺾임과 굽이침, 굵기와 필력, 비례, 주위와의 대칭,
힘있는 권위와 명쾌한 논리, 리듬 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 캔버스를 일국의 크기만큼 넓히면 왕이 된다.
온우주만큼 넓히면 그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시작하는 이 점이 중요하다.
최고의 건축가요 최고의 디자이너인 하나님은 이 점을 예수로 삼으셨다.
유독 큰 존재의 부각으로 그를 큰 하늘처럼 짓지 않으셨다. 가장 작은 존재의 현현으로 그를 겸손하게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한 점으로 그를 보내셨다.
이제 점의 모임인 선을 그린다. 선이 조합되고 연결되어 그림이 된다.
또 다른 그림이 점점 추가된다.
그래서 그림은 덧셈의 예술이다.
찍기 전 여백을 요리하고 수많은 뺄셈을 하는 사진과 다르다. 순간 아니면 찰라만 허락하는 사진과 크게 다르다.
즉 그림은 사진이 아니다.
그림은 반드시 그림이다.
그리는 그림이다.
그림은 마음의 그림이다.
렌즈에 들어온 것을 찍는 사진과는 달리, 그림은 사람 렌즈인 눈에 들어온 것을 마음에 우선 담았다 그려낸다.
곧 사진은 마음에 찍을 수 없지만 그림은 마음에 있는 것만 그릴 수 있다.
보는 것은 쉽다. 눈만 가면 된다. 그리는 것은 그렇지 않다.
손만 가는 게 아니다. 그리는 것은 창조다.
창조에 비하면 구경은…. 아니, 비교할 수도 없다.
허니 그림을 감상할 때 화가의 마음 속에 있는 철학적인 이미지를 봐야 한다.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없으면 그림을 본 것이 아니다. 채색만 본 거다.
하나님 그리신 이 세계, 사실 감상만 잘해도 된다. 작가의 의도를 조금만 파악해도 큰 성공이다.
베뢰아에서 가장 중요한 단원인 성경을 보는 안경.
여기서 시무언은 “언제나 성경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곧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머리로만 파악하지 말고 마음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영에 머물며 그림으로 새겨진다.
이것이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심비에 한 것”의 뜻이다(고후3:3).
성경은 사진이 아닌 그림이다. 성경 자체가 선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다.
하나님의 의도가 그러하다. 태초부터 오늘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선을 그어간다.
죄의 굵은 선(線) 때문에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어야 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 그와 함께 의에 이르게 되었다.
목사가 되는 기름부음의 안수도 선을 따라왔고 역시 선을 그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뜻이 그림으로 그려져 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고 마음에 그리자.
한 점을 찍을 때 온 힘을 다하고 한 선을 그릴 때 그분을 가까이 두고 그분을 모시며 사랑하자.
그 선이 끊어지지 않도록 과시할 수 있는 자신의 신앙 작품을 끝까지 그려보자.
‘점’으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