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참외를 먹어보셨어요?”
시무언이 씨에 관한 설교를 하시다 질문하신 거다. “개똥참외 같은 아이도 잘 키우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 서당 선생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씀이다. 의외였다. ‘개똥’이라 견분(犬糞)과 관련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적어도 중년의 나이는 지나야 개똥참외를 알리라.
개똥참외는 씨를 심거나 돌보지 않았지만 저절로 자라 열린 참외를 말한다. ‘개똥’이란 단어가 엉터리거나 보잘것없이 천한 것을 이르는 뜻 때문이기도 하다. 개똥참외의 크기는 달걀 혹은 커도 주먹만하다. 때깔도 황금빛이 아닌 똥빛이다. 맛도 참외보다 덜하다. 씁씁한 맛이지만 먹을만하다. 무엇보다 고향의 아련한 추억을 더해주는 그 맛이 중요하다.
대학시절, 구전가요인 <타박네>를 꽤 불렀었다. 줄거리가 엄마 젖을 그리워하는 가사다. 그런데 이 개똥참외 맛이 엄마 젖 맛과 같다는 반복구절이 있다. 콩밭 근처에서 우연찮게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밭 두렁에 오롱조롱 열려 있는 개똥참외를 발견한다.
“와, 개똥참외다!”
누구든 먼저 본 아이가 소리친다. 먼저 본 아이가 소유주다. 유달리 맛있는 것은 노란 똥빛이 자르르 도는 것. 풀밭에 기대어 푸른 하늘 쳐다보며 베어먹으면 씨에 딸려오는 과즙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사실 개똥참외는 하나님의 대단한 작품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糞)과도 관련이 없진 않겠다.
아이들이나 동네 개, 소가 참외를 씨까지 다 먹는다. 참외는 잘 소화되지만 참외 씨는 소화되지 않고 나온다. 똥 속에 숨어 있던 씨가 마침내 싹 틔우고 저절로 자란 것이 개똥참외다. 그래서 참외 철이 지나야 열린다. 가꾸는 이가 없었으니 작고 맛도 참외보단 덜 할 수밖에. 왜 가꾸는 이가 없겠나.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은 하찮은 것이라도 모두 창조의 가치가 있다(마6:26-30). 다만 우리가 모를 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는데.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이신데.
개똥참외는 아무도 모르지만 콩밭에서 씩씩하게 싹을 낸다.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지만 논두렁에서 무럭무럭 자란다. 아이들의 뱃속에 들어가도 기어코 똥과 같이 나와 싹을 틔운다. 동네 개의 뱃속에 들어가도 소화되지 않고 결국은 밖으로 나와 뿌리를 내린다. 씨가 또 씨의 세계를 만들고, 반복한다.
어디에든 떨어지면 열매를 맺는 개똥참외를 보며 하나님의 솜씨에 놀란다. 그래서 되돌아 보게 된다. 어디에든 열매를 맺는 개똥참외와 달리, 어디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우리 신앙은 아닌 지. 신앙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그것도 개똥참외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과 관원과 서기관들 앞에서 겁먹지 않았다.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 담대히 전했다. 장로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증거하지 말라 위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행4:5-12). 그게 예수의 제자다. 예수의 제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진리를 전한다. 예수의 제자는 분위기가 좋든지 좋지 않든지 항상 복음을 전한다. 기분이 좋든지 좋지 않든 지도 초월한다.
예수의 제자는 그리스도의 향기요 그리스도의 열매다. 모든 과일이 익어야 향이 난다. 성령으로 우리의 삶이 인도되고 침례라는 성령의 익힘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향이 우러난다. 어떠한 상황에 있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어코 싹을 틔우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어야겠다. 이것이 개똥참외의 설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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