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무언의 초기에 우주는 陰府였다. 사전의 설명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이란 뜻이다. 구약성경에는 스올(Sheol)로, 신약성경에는 하데스(Hades)로 나온다. 흑암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시무언은 우주를 사단을 가둔 장소, 마귀를 진멸할 목적으로 창조된 공간으로 설명했다.
우주는 넓은 곳이다. 우주와 함께, 우주 가운데에 만유, 곧 모든 있는 것을 지으셨다고 했으니 얼마나 넓은가.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늘 한 모퉁이에 있는 지극히 작은 섬과 같은 곳이다. 형무소처럼 마귀를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한 곳이다.
한편 우주는 하나님의 관심이 큰 곳이다. 아들이 들어가 죽음을 맛보고 부활할 곳이니, 사실 물질적 공간으론 작겠지만 실제로 관심을 갖고 보는 철학적 공간으론 크겠다. 두 번째 지으신 물질계에서 벌일 아들의 사투와 승리에 모든 천사들은 숨죽이며 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최근에 시무언은 우주를 산소통으로 비유했다. 이는 철저한 인간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개인의 수명이 각각 다른 것처럼 각각 등에 매고 있는 산소통의 산소가 소진하면 그 개인의 우주도 함께 소멸한다는 설명이다. 사람은 각각 자기 생명의 연한이 있다. 성경은 이를 “네 날 수를 채우리라”고 표현했다.
이런 시무언의 우주관에 선재하는 정의는 “시작한 날이 있는 것처럼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없어지는 것이 우주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과 인생은 우주만큼 넓어질 수도 오래될 수도 없다.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사람은 지구라는 좁은 소행성, 아니 대한민국이란 땅 조각덩어리를 초월하지 못한다. 우주의 나이가 아무리 길어도 사람의 ‘살 날 수’는 겨우 백 세 안팎이다.
그러니 우주를 바라볼 때 거창할 필요가 없다. 그의 산소통에 얼마나 많은 산소가 남아있는가가 그의 우주다. 갓 태어난 아이는 백 년을 쓸 산소가 있고, 어떤 이는 겨우 한 달 쓸 산소가 있을 뿐이다. 중환자실에 있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들은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그의 우주는 빈 산소통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빈 깡통이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이란 찬송가가 생각난다. 이 찬송가는 결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이 우주의 경이로움을 경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모든 영광이 결집되고 총화된 것이 솔로몬의 영광인데, 그것이 하나님 기르시는 백합화보다 못하다는 것이요. 인간이 연구의 고심과 반복의 노력으로 지은 도심 상공을 뒤덮는 빽빽한 마천루도 망망 대해와 높은 청봉(靑峯)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 지은 것은 아무리 뛰어난들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 못하다는 것이요, 그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와 그 속의 만유도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늘나라에 비하면 빈 깡통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무언은 우주를 설교하지 않는다. 빈 깡통을 설명하지 않는다. 육체의 고향을 안내하지 않는다. 빈 깡통에 산소를 집어넣고 육신이 겨우 연명하게 하는 조치를 말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시무언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한다. 산소가 필요 없는 영원히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설명한다. 영혼의 고향을 안내한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곳에는 산소통이 필요 없는 곳이다. 마르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명만 얻는 곳이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부활이란 또 다른 산소통을 매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 있는 부활이 아니다.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은 부활이 아닌 소생이었다. 그는 천국의 소식인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든 천국의 소식,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의 말씀을 새겨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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