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네 가지 우상이 있다고 영국의 베이컨이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이다. 현대인의 생활 속에 세 가지의 우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있다고 시무언은 설교했다. 베이컨의 그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여전히 적잖은 영향을 끼치는 우상.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 그것이 여전히 잠재해있다는 점에서 이를 옮겨 보고 싶었다. 두 가지는 이미 썼다.
극장의 우상은 무대나 극장, 특히 요즘엔 스크린과 연관되어 있다. 이를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연극, 극장, TV는 허구에서 출발한다. 현실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님에도 우상처럼 떠받들기에 극장의 우상이라 명하는 것이다.
시무언은 “모든 방송에 드라마가 나오지 않는 데가 없다. 전부 연속극을 방영한다. 그런데 그런 드라마는 원래 소설이다. 소설이란 적을 소(少)자와 말할 설(設)을 합친 거다. ‘적은 말’로 하는 것이 소설이다. 곧 적은 이야기 하나를 확대하거나, 지극히 작은 소제를 증폭, 과장하거나 덧붙인 것이 소설이다. 또 이 소설을 극화(劇化)한 것이 드라마다. 그래서 이들을 허구(虛構)문학이라 한다.”
무대는 시공간을 인위적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이 무대나 스크린 위에 소설이 펼쳐진다. 무대는 곧 소설의 살판이다. 스크린은 허구의 굿판이다. 소품, 조명, 의상뿐만 아니라 제일 중요한 배우의 연기도 모두 가짜다. 하지만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고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나아가 기쁨의 격정도 마구 토해낸다. 허구를 향해서 말이다.
감정을 쏟기까지 하니 점점 사람들의 인식은 스크린 위의 것이라면 진실과 권위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것이 문제다. 극장의 우상이란 아무리 경미한 것, 사소한 것, 비사실적인 것일지라도 스크린을 통해 보여지는 것에는 권위를 가미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시무언이 소설을 쓰지 않는 것은 소설의 허구성 때문이다. “문학을 정말 좋아하지만 난 수필이나 시는 하고 싶어도 소설로는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필은 자기를 벌거벗지 않으면 안 된다. 수필은 자기를 감추어 가면서 쓸 수 없다. 솔직하게 사실 그대로 역사적인 증명이 되도록 써야 한다. 그러나 소설은 이 반대다.”
성경에도 극장의 우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평생 거룩하게 산 바리새인들이니 그들의 품행이 모범이야”, “성경만 공부하고 암기해서 쓸 정도인 서기관들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야”, “또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요18:22) 이러한 것들은 모두 권위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우상의 한 형태다. 충분히 오류일수도 있는데 의심없이 '무조건 참일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현상이 극장의 우상이다.
“유명한 의사가 선전한 약이니깐 몸에 좋을 거야”, “뉴스에서 자주 나왔으니 그 사실이 맞을 거야”, “여성상위가 대세라 남편을 휘어잡는 게 맞아, 그게 현대인의 세련된 문화이거든”, “여자 아무리 착해 봐야 소용없어, 남자들은 얼굴 예쁜 사람을 좋아해” 모두 극장의 우상의 좋은 예들이다.
극장의 무대 위의 것에 무조건적 권위를 보내는 것처럼, 학문적 패러다임의 영원한 지배를 받는 것, 이단이란 소문이 돌면 계속적 이단이 되는 것, 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보다 대대로 내려온 교리와 유전에 더 많은 권위를 두는 것도 역시 극장의 우상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극장의 우상을 깨뜨렸다. 바리새인의 외식을 무너뜨렸다. 서기관들의 고집을 깨뜨렸다. 대제사장들의 편협함을 쓸어버렸다. 예수는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셨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지금도 극장의 우상을 어서 깨뜨리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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