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바닥’도 괜찮겠다. 사물적으로 잡는 게 “시무언의 천지만물”이란 연재에 맞을 것 같지만. 모두 불타고 겨우 남은 찌꺼기인 ‘재’로 글 쓸까도 이전부터 했었다. 치약 이야기는 2005년에 처음 하셨다. 이때 시무언은 고 손기정 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언급했다. 좀처럼 성경 밖의 인물을 예화로 들지 않았지만 이날은 두 분이나 말씀했다.
성경에는 치약이 없다. 당시 사람들이 양치를 하긴 했을까? 팔레스타인 당시의 기록을 보면 치약의 대용으로 썼던 것이 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드린 세 예물 중 하나인 몰약이 그거다. 충치 예방에 좋아 차(茶)를 달이는 방법으로 추출해 썼다 한다. 사랑에 관한 성경인 아가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齒)를 깨끗하게 목욕하고 나온 어린 양에 비유한다. 몰약으로 양치를 해서 그런 것이 일까?
“비행기를 타면 치약과 칫솔이 붙어 나온다. 아마 치약 중 제일 작을 것이다. 내리기 전에 쓰라는 일회용이다. 아내와 나는 이 치약을 꼭 가지고 온다. 버리지 않고. 아내와 둘이서 쓰면 일주일 이상을 쓴다. 수십 번을 그랬다. 조금 쓰고 쓰고 쓰고 또 쓰고…. 나중에는 끄트머리를 이로 물어뜯어 또 썼다.” 시무언의 이야기다. “내 인생은 이 작은 치약과 같다.”
최근 말씀한 ‘바닥론(論)’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한다. 바닥이 나도록 다해야 한다. 헌데 사람들은 맛이나 보고 폐기처분 한다. 바닥이 날 때까지 다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써야 함을 시무언은 역설한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진리, 하나님이 주신 성령과 내세의 능력을 바닥까지 다 쓰는 사람이 요즘은 거의 없음을 한탄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맛이나 볼 뿐 그냥 방치해 버린다. 녹슬고 시들어버린 하나님의 은사를 보며 사람들의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경고한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다 이빨로 물어서 짠 다음 최후의 한 방울이라도 다 써야 그 다음 하나님이 일하신다. 다 짜버리고 더 이상 나올 것 없는 쓸모 없는 빈 껍데기처럼 일해야 그 다음 하나님이 일하신다. 재(灰)가 될 지라도 전혀 아깝지 아니할 정도로…. 육체를 다 써 흙으로 돌아갈 지라도 이를 아쉽다 여기지 아니할 정도로….
성경에는 이런 ‘치약’ 이야기가 거의 전부다. 하나님이 쓰신 종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것을 아낀 이들이 없었다. 바울이 그랬다.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그랬다(사도행전 14장).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죽여 성밖에 내버린다. 제자들이 안타깝게 쳐다볼 때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깨어난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이웃 성 더베에 들어 가 또 전도한다. 자신을 다 쓸 때까지.
엘리야도 그랬다(열왕기상 18장).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과의 대결에서 혈혈단신 힘껏 싸워 이겨냈다.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해 오래된 가뭄을 그치게도 했다. 기진맥진했다. 늘 탈진했다. 그럼에도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먹고 사십 일이 걸리는 호렙산까지 또 걸어갔다. 목숨을 앗아가는 거친 사막을 지나 힘과 숨과 뜻이 바닥날 때까지.
요한 바오로 2세는 역대 가장 부지런한 교황이었다. 별명이 De Labore Solis(태양처럼 애쓰다)였다. 운명하기 직전까지도 직무를 다했다. 손기정 옹은 “테이프를 끊자마자 쓰러져 기절할 만큼 전력을 다해 뛰어야 한다”고 했다. 80년대에 시무언이 신앙을 돌아보게 된 중요한 일침이었다.
시무언이 말하는 ‘치약’은 육신에 힘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치약 짜듯이 다 짜고 다 사용해 정말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이다. 육신에 마지막 한계가 왔을 때 성령을 의지함으로 인간의 연약함을 덮으시고 하나님이 펼치시는 그 웅장한 역사를 보고 싶기 때문이리라.
참조: 2005.04., 2011.08.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