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약국을 했었지만 어릴 적엔 그리 부유하진 않았던가보다. 연년생을 키우기 힘들다는 외할매의 핑계로 돌잡이를 했던 그날부터 외갓집에서 키워졌다. 외할배는 꽤 큰 목공소를 하셨고 목부 아저씨들도 많았었다.
지금도 새록새록 하다. 공장에선 향긋한 나무 냄새, 은은한 아교 냄새가 코끝을 감돌았다. 문 곁의 아저씨는 한쪽 눈을 감고 망치질을, 다른 아저씨는 양손으로 톱을 키고, 다른 아저씨는 한 손으로 나뭇결을 쓰다듬으며 대패질을 하셨다.
신기하고 황홀했었다. 쓱싹이는 톱질 사이로 흰 눈처럼 쏟아지던 톱밥과 딸아이 머릿결처럼 곱게 말려 올라가던 대팻밥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을 보면 꽤 힘들겠구나 느끼곤 했지만 그들의 손이 신기했었다.
외할배와 아저씨들이 나무판으로 예술품을 만들진 않았다. 책상이며 의자며 일상에서 쓰이는 가구들을 만들었고 간혹 푸른 상세도를 가져와 큰 무엇을 짓는다며 머리를 맞대며 이야기를 했었다.
예술품처럼 정교함과 치밀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성을 다하시는 외할배의 얼굴은 지엄했고 진지했다. 시무언이 나무 예술품을 설교하실 때면 늘 그때의 외할배 얼굴이 생각난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수작업인 나무 예술품은 톱질과 끌질, 대패질의 반복된 작업이다. 이 작업들은 톱밥, 끌밥, 대패밥이라는 부스러기를 만들어낸다. 원목재에서 필요 없는 이것들이 차츰 제거되면 마침내 훌륭한 작품이 된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을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든 천국을 아는 우리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목숨을 톱질하고 끌질하며 살고 있다. 혹은 그 톱질로 작품을 만들고 있고 혹은 그 끌질로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으리라.
세인들이 톱밥처럼 미세하게 부스러져버린 자신의 인생을 알기나 할까? 몸과 마음, 소년과 젊음, 그리고 숱한 지식들을 여기저기에 다 뿌려놓았다. 하늘나라를 모르고 허공을 휘휘 저으며 살았으니 겨우 남은 것은 후회와 허무와 상처투성이뿐이리라.
시무언은 “세상의 영광을 발견하려고 급히 왕래하는 세인들의 발걸음은 자기의 목숨을 톱질하는 것”이라 하신다. 그들은 뼈 마디마디의 힘을 다 빼어 팔아 버린다. 두뇌를 파서 팔고 목숨도 겨우 숨 쉴 자리만 남겨놓고 다 팔아 버린다.
왕성했던 젊음도 팔아 버리고 돌려받은 것이란 톱밥 같은 최후의 인생만 남는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 되면 그제야 살아왔던 인생의 족적을 돌이켜보는 것은 왜일까? 좀 더 멋지게 살 걸…
하늘 영광을 찾고 하늘나라를 위해 부단히 주께 충성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걸음은 자기 영혼을 위해 자기 육신의 시간을 끌질하는 것이다. 욕심과 교만 등, 육신의 모든 톱밥들을 깎아 영혼의 훌륭한 작품을 만들자.
톱밥과 끌밥은 작품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울인 성경의 거울에 비춰 그분의 톱과 끌인 말씀으로 내 육신의 부스러기들을 제거해야겠다. 거칠고 툭박하며 못생긴 목재라도 하나님의 의도와 뜻에 맞게 다듬어지는 인생만이 자랑스럽게 쓰임을 받으리라.
그러고 보니 우리 대장 예수의 직업이 무엇이셨더라? 우리 숨결을 다듬어사 성령으로 호흡하게 하셨고, 우리 육신의 시간을 두드리사 거룩한 예배로 이끄셨고 우리 물질을 꺾으사 십일조하게 하셨으니… 얼마나 멋진 목수이신가.
출처: 내평생에 1권, 20071230 목사코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