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염소
현대인들에게는 양과 염소의 분별이 쉽지 않다. 마태복음 25장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기록한다. 이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신다.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 사람들을 분별하신다. 양 같은 의인은 영생(永生)을 얻는다. 염소 같은 이들은 영벌(永罰)에 처한다. 무서운 말씀이다. 사뭇 양과 염소의 차이가 어떤지 궁금하다.
어릴 적 일(一)자 모양의 염소 눈이 꽤 무서웠다. 그 일(一)자도 쉬 볼 수 없는 굵은 네모 모양이었다. 염소는 한자로 산양(山羊)으로 쓴다. 외모가 양과 비슷하기 때문. 하지만 서로 종(種)이 다르다. 염색체의 수도 양은 54개, 염소는 60개다. 합방을 해도 새끼를 못 얻는다. 설령 교배가 되어도 태중에서 죽는다. 영국에서 몰래 실험도 했었지만 말이다.
이 둘의 차이는 뭘까? 우선 식성이 다르다. 양은 풀만 먹는 초식성이다. 반면 염소는 종이쪽지, 솔잎, 뿌리 등 닥치는 대로 먹는 잡식성이다. 이러한 식성은 성격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양은 단순하고 겁이 많다. 시무언은 “양은 둔하고 미련하다. 뭐가 유익한지를 잘 가리지 못한다. 들판에 불이 나도 불을 피할 줄 모른다. 서로 엉겨 붙어 타 죽는다. 목자 없이는 맹수의 밥이 될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 했다.
양은 항시 목자가 어디에 있나 살핀다. 겸손과 순종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젖 먹을 때는 무릎 꿇는다. 모르는 길로 절대 가는 법이 없다. 갔던 길로 되돌아오는 습성이 있다. 시무언은 이를 놓고 “앞만 보고 걷는다”라 했다.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예외적인 경우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거나 개나 맹수에게 겁이나 무리에서 이탈된 경우다.
시무언은 염소는 이와는 반대라 했다. “염소는 가르고 나누는 습성이 있다.” 겁이 많은 양들은 모이기에 힘쓴다. “백 마리, 천 마리가 되어도 양들은 목자를 중심으로 군집을 이룬다. 그러나 염소는 많아야 스무 마리 정도가 떼를 이루고 이 떼도 두세 패로 나누어지기 십상이다.”
염소는 난폭하며 이기적이다. 참을성도 없다. 서로 잘 다투고 싸운다. 수틀리면 목자라도 뿔로 떠받아버린다. 또 양떼가 모여있으면 헤집고 다닌다. 목동들은 이런 습성을 이용하기도 한다. 더운 여름이라도 몸을 바짝 붙여 지내는 양들이 피부병이 돌까 봐 일부러 양떼들에 염소를 일정비율로 섞기도 한다.
믿는 자 중에도 양과 염소가 있다. 우선 예수께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불리셨다. 요한계시록에는 어린 양이란 단어만 27번 나온다.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그대로 이루셨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다. 털 깎는 자 앞에 선 양처럼 입 한번 열지 않으셨다. 모든 고난과 핍박을 다 참으셨다.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이자 명령대로….
어린 양이 이런 분이시니 우리에게 양이란 무엇일까? 양이 교훈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무언은 “아멘”을 놓고 이 둘을 설명한다. “염소는 예수 믿고 순교하자고 해도 아멘 하고 예수 믿지 말고 죽자고 해도 아멘 한다.” 염소란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는 잡식성 동물이기 때문이다. 염소는 진리가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아멘 한다.
그러나 양은 진리를 알고 진리에만 아멘 한다. 자기 주인의 품에 안기는 것을 몹시도 좋아한다. 털을 막 깎아내어도….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 해도 도망하지 않는다. 원망 섞인 목소리나 거부의 눈빛 조차 보내지 않는 게 양이다. 목자이신 예수를 항상 살피려 한다. 주인의 음성을 듣고 아멘 하며 움직인다. 주인을 위해 살과 젖, 가죽 심지어 뼈째로 내어놓는다(출애굽기 12장).
코가 시큰거린다. 글을 더 못쓰겠다. 눈을 감는다.
“나는 양일까 염소일까?”
참조: 2009.04설교, 『목회실천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