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누에
때가 있더라. 아주 긴 인생을 살진 않았지만 정말 그렇더라. 길게 살진 않았지만 목회자의 신분이라 그런 것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기다림의 참을성이 부족해 포기한 낙심의 그림자 때문일까? 성경을 펼쳤다. 전도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말년에 인생의 의미를 기록한 책이다. 가득하더라.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죽을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세 번째 장(章)에만도 31번이나 “때가 있다”고 말하더라.
“어떤 씨는 삼 일, 또 어떤 것은 육 일이 그 때다.” 며칠 전 진행되었던 목회자성장대회 때 시무언이 하신 말씀이다. 씨를 뿌리면 싹이 올라야 그 때고, 태중의 아이는 태어나야 그 때다. 상추나 열무는 삼 일이면 싹이 올라온다. 병아리는 21일이면 알을 깬다. 오리는 28일. 사람과 소는 280일이면 새끼를 본다. 동물 중 가장 오랫동안 때를 품고 있는 것은 인도코끼리. 640여일 동안 때를 품고 기다린다.
누에의 때는 꽤 짧다. 그래서 오히려 인생들에게 경이롭고 아름다운 삶을 알리려는 듯 하다. 누에고치에서 나방이 나온다. 이내 교미하고 또 바로 알을 낳는다. 서로 엉킴이나 쌓임이 없이 빈틈도 없이 가지런히 낳는다. 그리곤 죽는다. 시무언은 “이 순간이 얼마나 짧은 지 모른다.”고 했다. 움직이지 않을 때의 마지막 그 모습. 그리고 빼곡히 배열된 알들을 보노라면 장엄의 물결이 덮쳐댄다. 고치에서 비단실을 뽑기가 숙연해질 정도로….
짧다. 누에를 통한 하나님의 때 말이다. 이 짧은 때도 하나님의 경륜이다. 짧은 순간이 무슨 경륜이냐 말해선 곤란하다. 긴 것만 하나님의 경륜인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수의 재림이 더디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지만 하나님은 “더딘 것이 아니라” 하셨다. 금방이라 하셨다. “도적 같이 온다”고 하셨다(베드로후서 3:9~10)
수십 년 아니 몇 일도 못 기다리는 우리 인생이다. 하늘 아래 모든것에 때가 있다. 무슨 일에나 모든 목적에도 그 때가 있다. 어떤 것은 짧을 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의지를 담고 계신다. 하나님의 경륜 아래에서는 피조물의 생각과 뜻은 초월되고 만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시는 것이 경륜이다.
그러므로 “경륜에 맡기면 오히려 지루하지 않다.” 시무언은 인간이손댈 수 없는 경륜에 믿음을 부여한다. 아니 항복하라고 말한다. 사람이 전혀 다룰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말이다. 경륜이란 철저히 하나님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사도행전 1:7) 하시며 우리가 알 바가 아니라 하셨다.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마태복음 24:36) 하셨다.
누에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그 짧은 경륜을 길게 펼쳐보자. 내 삶에 그리고 내게 주어진 직분과 역사가 길고 지루히 느껴질지라도 언젠가 꽃피고 역사될 뜻이라면 정말 감사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무덤의 사흘도 주님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는 시무언의 말씀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경륜을 예수는 존중하셨다. 지난 글 (43)번 삭쟁이 편에서 쓴 것처럼 ‘시간을 결코 멈추지 않으셨다.’
때를 품어야겠다. 경륜은 사람이나 어떤 피조물의 참여와 상관없이 꼭 성취되는 것이다. 제한하거나 중단시킬 수도 없다. 창세 전 천사의 타락이나 창세 후 인간의 범죄라도 하나님의 경륜의 바퀴 앞에선 깔려 무너지고 만다. 허니 하나님의 경륜 앞에서 겸손한 심령으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겠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결실이 맺어지는 그 경륜의 때가 소중하며 기대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경륜의 손에 맡기면 지루함이 아니라 사모함이 커지지 않는가?
“별을 되려면 다섯 번 가야 한다. 시작한 제 자리로 찾아가야 별이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경륜처럼 일의 때를 품자.”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제 37회 국제도서전에서 경륜과 관련한 시무언의 말이다.
참조: 2011목성,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