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혀
혀는 능력이 많다. 까끌한 혀로 접촉의 감각을 느끼고 음식을 삼키게 한다. 땀샘이 없는 개는 혀로 열을 발산한다. 뱀은 날름거리는 혀로 냄새를 맡는다. 뱀의 혀는 눈보다 더 정확하고 뛰어나다. 혀로 인사하는 곳도 있다. 티베트에선 혀를 길게 내밀어야 도깨비나 악인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조물주가 사람에게 혀를 만들어 줄 때 제일 고려했던 능력은 말이다. 무색, 무취, 무맛, 무형의 말이지만 굉장한 파워가 있다. 창조적 능력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 괴력도 가졌다. 이집트에선 혀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뉴질랜드에선 혀가 축사(逐邪)의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
혀를 반추해본다. 사랑도 슬픔도 혀로 표현된다. 시도 혀로 낭독되어야 더 문학스럽다. 혀가 없어 말 못하고 마음 통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잘 표현된 마음은 인간관계를 봄볕처럼 감싼다. 혀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삶을 활기차며 행복하게 이끈다.
혀는 감정과 생각을 문학하고 역사를 창조하고 문화를 만드는 도구다. 헌데 너무 말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말이 너무 많다. 수다와 아부는 말 많은 혀와 가깝다. 쉴 새 없이 놀려대는 혀는 어찌나 듣기 싫던지 뱀의 혀 같더라. 위선 가득한 아부를 들을 때는 식용유에 느끼한 마요네즈를 잔뜩 버무린 것 같더라.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또 아버지로부터 숱하게 들었던 말이 있다. “귀는 친구를 만들고 입은 적을 만든다.” 이미 성경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가 있기에 자주 인용하진 않지만 역시 내 자식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가교(家敎)다.
시무언은 “혀는 열쇠다. 혀는 생각의 비밀을 여는 열쇠”라 했다. 말을 하다 보면 성령이 강권하심이 있던지 아니면 무거운 고민들이 풀어지는 경우도 있다며 “혀는 자기 속에 들어 있는 생각과 뜻을 밖으로 분출시키는 장치”라 했다.
시무언도 혀의 약점을 적시한다. “혀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은 불의의 도구다.” 이는 야고보 사도가 집중적으로 언급하는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와 맥이 같다. 믿음이 뛰어난 자라도 혀를 잘못 다루면 그 신앙은 헛것이다(1:26). 말(馬)은 입에 재갈을 물리듯, 배는 작은 키로 조종하듯 사람은 혀를 어거해야 한다.
온갖 짐승과 벌레와 바다짐승이라도 다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이지 못한다고 야고보 사도는 단언한다. 같은 혀로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이러한 혀를 누가 어거할 수 있을까?
성령을 받은 첫 변화는 주로 방언이다.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하늘의 언어다. 성령이 오시면 맨 처음 다스리는 것이 바로 혀다. 다 길들일 수 있지만 사람이 길들일 수 없는 혀를, 성령이 오시면 방언을 통해 즉시 혀부터 다스리신다. 곧 성령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까지도 지배하신다.
혀는 열쇠다. 혀는 칼이다. 혀는 생사를 가르는 도구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 전투 중 날아든 총탄은 육신을 죽이지만 일상 중 뱉은 말 한 마디는 영혼을 죽인다. 혀는 자국을 남기지 않지만 뼈를 꺾고 심장을 휘벼판다. 사람의 모든 행복과 불행이 혀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한 사람이 말을 잘못 전함으로 수백 명이 시험 드는 경우를 종종 본다. 뜻을 전하지 않고 나쁜 말만 골라 전하니 그 결과가 어찌되겠는가. 혀의 열매는 결국 쏜 자가 먹는다(잠18:21). 칼날에 쓰러진 자보다 혀 때문에 무너진 자가 더 많다. 차라리 시무언(視無言)했으면 좋겠다. 무언은 침묵이 아니다. 무언은 영혼과 하나님이 교통하는 기도다. 또 나와 당신의 영혼이 교류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