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탁쉬
그래도 꽃이 예쁘다. 내장산 낙엽이 장관이었지만 많아서 그렇지. 하나만 놓고 보면 꽃만하랴. 꽃은 영광이다. 가장 찬란한 자신의 때를 맞춰 풍채를 뽐낸다. 그래서 뭇이 감탄한다. 감탄은 눈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광의 때를 알리는 꽃은 곧이어 그 나무의 진액을 보여준다. 입도 감탄하도록 열매까지 준다. 진액을 뭉쳐놓은 열매 말이다.
시무언은 무화과를 극찬하곤 한다. 한자가 설명한다. 無(없을 무) 花(꽃 화) 果(열매 과). 곧 꽃 없이 열매를 맺는 나무다. 꽃이란 찬란한 자신의 영광스런 때인데, 그런 자랑이나 뽐냄이 없이도 묵묵히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무화과는 꽃이라는 최고의 영광을 피우지 않고서도 열매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에 배울 것이 많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의 진액을 모으고 뭉쳐놓는다. 그래서 시무언은 “헌신 때가 되면 무화과나무가 생각난다”고 했다. 자기 영광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찾으시는 열매만을 열심히 만드는 그 아름다운 성락인의 모습 말이다.
허니 “그래도 꽃이 예쁘다”는 무화과에는 통하지 않는다. 열매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열매만 기억된다. 열매 없는 무화과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녹음과 푸르름을 선사하는 잎사귀가 무성할지라도 예수께서는 그걸 찾지 않으신다.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렇게 되면 큰 일이다.
사실 큰 일이 일어났다. 아침에 보았던 그 나무가 저녁에 보니 뿌리로부터 말라 있었던 것. 예수께서 꾸짖으셨기 때문이다. 시장하여 무성한 잎 사이에 달려 있는 '무엇'을 먹을까 하여 찾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기에 꾸짖으신 것이다. 사실 이때는 무화과가 열리는 때가 아니었다. 제자 마가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가는 연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가 알고 있는 '무화과의 때'는 시즌(season), 곧 정규 수확 철이다. 잎이 막 무성해지면 앞으로 무화과 열매가 달린다는 표시로 작은 마디로 된 알맹이가 열린다. 이게 아랍어로 “탁쉬”(taqsh)다. 그리고 수확철에 열리는 것을 “빅클”(bickle)이라 한다. 히브리어로는 각각 “파게”, “테헤나”라 부른다.
탁쉬는 일꾼들이나 꼬마들이 배고플 때 따먹는다. 돈을 받고 팔만한 상품은 아니지만 허기를 달래는 데에는 그만이다. 탁쉬는 참 무화과 열매인 빅클이 만들어지기 전에 다 떨어진다. 하지만 잎사귀와 함께 탁쉬가 열리지 않으면 시즌이 와도 빅클이 맺히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이를 아셨던 것이다. 마가도 이를 알았기에 자신있게 기록했던 것이다. 탁쉬가 열리지 않았으니 '참 무화과의 때'가 와도 열매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잎사귀만 아름다우면 뭣하나. 무화과는 열매로 모든 것이 판단되는데… 열매가 없는 무화과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
시무언은 탁쉬로 일컬어지는 이런 무화과를 계시록 6:13에 나오는 “선 무화과”라고 했다. 선 무화과의 '선'에 관해 영어성경의 해석은 다양하다. 설익은(unripe), 때에 맞지 않는(untimely), 늦은(late), 겨울철의(winter) 등등. 그러나 시무언은 이 “선”을 ‘회오리바람 선(颴)’ 혹은 '부채바람 선(扇)'으로 본다. 이는 계시록 6:13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해석이 아닐까?
탁쉬는 약하다. 비바람이 불면 와르르 떨어져 버리니 대풍 앞에서야 어찌 견디리오. 탁쉬는 핍박과 고난과 역경을 이길 힘이 없다. 그 전에 먼저 주님의 시장하심을 들어주었어야 했다. 그게 탁쉬의 쓰임 받음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 탁쉬는 결국 역경과 고난이 오면 제 나무에서 다 떨어지고 만다.
하나님 앞에 전혀 쓸모가 없는 영혼이라면 어찌 될까? 작은 일에서부터 쓰임을 받아야 큰 일에도 쓰임을 받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성실과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나 비록 작을 지라도 정녕 주님께 쓰임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