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코끼리
코끼리, 긴 코와 큰 덩치가 퍼뜩 생각난다. 코가 긴 것은 150센티미터라 하니 웬만한 초등학생 키보단 크다. 덩치는 최대 7톤. 코의 무게는 덩치의 1/5수준. 곧140킬로그램이나 나간다. 땅 위의 동물 가운데 가장 몸집이 크다.
코끼리를 성경에선 읽어보진 못한 것 같다. 찾아봤다. 대신 코끼리의 상아는 몇 번 등장하더라. 솔로몬 왕 때에 무역이 활발했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스페인 남부의 다시스까지 가서 금은, 상아와 원숭이, 공작새까지 수입했다는 내용이 열왕기상에 나온다.
코끼리는 사실 성경의 동물은 아니다. 오히려 불교 쪽에 더 가깝다. 부처의 태몽이 흰 코끼리(白象)였다. 부처가 수도하러 정각산에 갈 때 타고 다닌 것이 백상이다. 스리랑카에선 코끼리를 위해 국장(國葬)을 치른 적도 있다. 인류역사상 동물을 위해 국장을 치른 유일한 경우다. 스리랑카는 불교국가다.
시무언은 코끼리로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는 ‘맹인들의 코끼리’다. 곧 베뢰아의 한 챕터인 ‘성경을 보는 안경’과 관련되어 있다. “맹인 네 사람이 코끼리를 만진다. 한 사람은 벽이라 말한다. 아냐 밧줄이야 라는 사람도 있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큰 기둥이라 한다. 코를 만진 맹인은 구렁이라 하고….” 성경을 읽을 때 전체적인 맥락, 곧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선 제대로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을 설명할 때 이 예화를 인용했다.
맞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들의 조합이다. 뜻들의 조합이 담긴 다양한 사건들이 성경이다. 해바라기 씨의 오밀조밀한 모임이 둥근 해바라기 꽃을 이루는 것처럼. 동일한 모양의 육각형 구멍들이 모여 벌집을 이루는 것처럼. 성경을 볼 때에 한 사건이나 문자에만 매달릴 때 ‘맹인의 코끼리’ 현상이 생기는 거다.
둘째는 ‘새끼줄의 코끼리’이다. 최근 설교 중에 말씀하신 내용이다. 시무언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파리를 방문했을 때 이야기다. 사파리(Safari)는 야생 동물을 가두지 않고 키우는 자연공원. 코끼리 가족과 약 50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취 총을 가진 요원이 급히 뛰어오며 빨리 차에 타라는 것이다. 그 요원의 설명이 이러했다. 코끼리 가족이 급히 움직일 때 방해거리가 있으면 그냥 피하지 않는다. 나무나 자동차가 있어도 피하지 않고 그냥 떠다 밀고 간다. 그러니 원두막이나 웬만한 것은 그냥 밟고 가버리니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달리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 ‘인간탄환’이 시속24킬로미터다. 느슬느실 움직이는 하마도 시속 33킬로미터. 코끼리는 최고 40.2킬로미터까지 내니 보통 사람의 두 배다.
재미있는 것은 힘도 있고 덩치도 있고 속도도 빠른 코끼리를 제어하는 것은 다름아닌 가는 새끼줄. 새끼일 때부터 다리 한 쪽을 계속 묶어두면 힘센 어른이 되어서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다리에 묶여있기만 하면 코끼리의 머리 속에는 ‘나는 움직일 수 없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밤이 맞도록 고민하며 고기를 잡지 못했던 베드로가 생각난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때 그는 ‘그래도 내가 어부인데, 전문가인데…’하는 고정관념을 내려놓았다. 예수의 말씀에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시간이 빨리 달리는 현대에도 고정관념은 사람을 묶어둔다. 고정관념의 늪에 아예 빠져있다. 예수는 이 땅에 우리가 죄인이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거기서 해방시키려 오셨다. 그 해방의 증거가 보혈이다. 성령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일할 때 함께 증거하신다. 성경을 상고할 때도 과학과 이성인 찌꺼기인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게 신사적 마음을 가진 베뢰아 사람이다. 코끼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