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해어진 소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굵직한 기업에 다니는 한 일본인을 시무언이 만났다. 서로 인사를 하다가 그의 옷소매가 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소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20년 동안 이 옷을 입었습니다. 옷은 두 벌뿐이랍니다. 저는 괜찮답니다. 이런 게 더 좋습니다.”
놀란 것이 이뿐만 아니었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은 고급스런 음식점을 초대받아 갔을 때다. 음식이 나오는데 콩 다섯 알, 세 숟갈이 채 되지 않았던 쌀밥 등 다소 빈약해 보이는 음식들 때문이었다. 특히 후식으로 나온 일본 전통과자인 화과자는 너무 작았다. 예술품처럼 보였다. 먹기에 아까웠다. 시무언은 이때 일본이 과연 선진국임을 알았다고 한다.
성경에서 “해어지다”를 찾아보았다. 생베 조각의 해어짐(마9장), 출애굽 후 40년간 해어지지 않은 의복(신8장), 여호수아를 속이려 낡은 전대와 해어진 옷을 입었던 기브온 거민들(수9장), 게으른 자의 해어진 옷(잠23:21) 등. 전부 가난이나 게으름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해어진 소매”가 말하려는 것은 가난이 아니다. 오히려 절제다. 절약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하려 했던 그 절제 말이다(고전9:25).
일본인에게는 절제주의가 있다. 그들은 “꼭 필요한 만큼만”이란 말을 자주 한다. 철저하게 절약한다. 절대 낭비를 않는다. 음식을 사 먹어도 남기지 않는다. 필요한 소비를 빼곤 모두 저축한다. 그러니 부자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적게 먹기에 장수국가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생각과 행동, 그리고 건축양식에도 절제가 묻어 있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남한에서 먹고 남은 음식으로 북한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은 절제보단 풍성을, 절약보단 소비를 택했다. 알뜰하게 살려 하면 “없어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습성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시무언은 사무처를 갈 때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절제하라”다.
역사 속의 위인을 보면 절제된 삶을 산 이가 많다. 성경 속의 선배들도 절제된 삶을 살았다. 침례 요한은 낙타 가죽옷을 입었다.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었다. 광야에서 살았다. 엘리야는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었다. 목마를 때는 시내 물을 먹었다. 날아다니는 새도 거처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는 머리 둘 곳도 없었다. 주의 제자들은 가난한 전도여행을 했다. 두 벌 옷도 신이나 지팡이도 갖지 않았다. 오천 명을 다 배불리 먹인 다음에도 남은 것을 거두게 했다.
역사 속이든 성경 속이든 상관없다. 어느 속이든 기라성 같은 위인들은 절제를 친구 삼았다. 절제하는 생활은 영적 생활에도 승리를 이끈다. 교회의 감독이 되려는 자는 절제가 중요했다(딤전3:2). 성도도 규모 있게 행했다. 무절제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살후3:7). 성도의 아내된 자들도 사치하지 않고 절제했다(벧전3:3).
성령의 열매 중 마지막 열매가 절제다. 사랑이 제일 크지만 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전13:5)했다. 곧 사랑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 사랑이 시작이라면 절제는 끝이다. 사랑이 서론적인 깊은 뿌리라면 결론적인 큰 열매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려면 절제도 꼭 필요하다(벧후 1:11).
옛날 우리교회에는 ‘절제회(節制會)’가 있었다. 또 교회 식당에서 매일 “잔반 남기지 마세요”라고 외치던 장로님도 계셨다. 크리스천세계선교센터의 입당을 앞두고 시무언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적인 일을 할 크리스천센터다. 입당을 앞둔 지금, 이제부터는 절제가 절대 필요하다. 뭐든 절제해야 한다. 권사님을 주축으로 절제운동을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