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황새
새는 보통 동그랗게 웅크린 채로 잔다. 머리는 등 속에 파묻는다. 바람이나 한기에 노출된 부분을 작게 한다. 모두 체열의 손실이 적도록 하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황새는 독특한 모양으로 잠잔다. 꼭 한쪽 다리는 들고 다른 한쪽 다리로 온 몸의 무게를 지탱한 채로 잠을 잔다. 필시 다리 근육의 힘이 좋아야 하리라. 상체의 평형감각도 웬만큼 훌륭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리라.
황새는 잣나무나 백향목 같은 곳에 둥지를 튼다(시104:17). 하지만 서식 환경은 얼음 위나 진흙 못, 혹은 얕은 물 속이다. 차갑고 물이 있는 곳이니 온 몸을 웅크릴 수 없다면 한쪽 다리로 서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얼음같이 차가운 물 속이라도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 겨울 아침 민통선 부근에선 얼음 링을 발목에 찬 황새들이 종종 목격된다.
황새가 동상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발목에 원더네트(wonder net)라는 냉열장치 때문이다. 정맥과 동맥이 얽혀 있는 모세혈관 다발로 돼 있다. 온 몸에 따뜻한 피가 흐르다가 발목에 이르면 이 장치가 피를 식힌다. 밖의 온도와 같은 온도로 피를 맞춰준다. 발목 아래로 차가운 피가 흐르니 동상을 알 턱이 없다. 반대로 발목 위로 올라갈 때면 이 장치가 피를 데운다. 펭귄의 발바닥에도 이 원더네트가 있다. 참고로 우리가 새의 무릎으로 알고 있는 부분은 사실 새의 발목이다. 새의 무릎은 몸 속에 있어 잘 안 보인다.
성경에도 황새가 두 번 나온다(레11:19, 신14:18). 그런데 최근에 나온 다양한 성경번역본은 기존 성경이 ‘학’이라 표현한 곳을 ‘황새’로 번역했다. “하늘의 황새도 제 때를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여호와가 바라는 공평을 알지도 못한다”(렘 8:7)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과 완악함을 비판할 때의 설교다.
황새는 천연기념물 제199호다. 우리나라에선 옛부터 길조로 여겨졌다. 서화 등에 많이 그려졌다. 십장생에 있는 학도 사실은 황새라 한다. 500원 동전에 그려져 있는 것은 학(두루미)이다. 서양에서도 황새는 아기를 가져다 주거나 행운을 안겨주는 좋은 새로 여긴다. 욥기를 보면 황새의 깃과 털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 말한다(욥29:13).
하지만 성경은 황새를 부정한 짐승으로 분류한다.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레 11:13,19) 사실 성경은 닭과 비둘기, 메추라기를 제외한 조류 대부분과 파충류 전부를 부정하게 여긴다. 파충류는 기묘한 외형과 행동 때문이겠지만 조류는 왜일까?
교회에도 황새 같은 사람이 있다. 다리 하나를 들고 있다가 마저 들면 날아가버리는 황새처럼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기웃기웃 거리다가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힘들면 떠나버리는 그런 신자들 말이다. 그래서 누가 “그 사람 신앙생활 잘 하나요?”라고 물으면 “황새에요.”라고 대답이 오면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들고 있는 한 다리를 내려놓게 하려고 무던히 기도하고 심방한다는 뜻이다. 곧 “더 노력해야 해요.”라는 표현이다.
반면 황새와는 정반대인 닭 같은 사람도 있다. 닭은 무거운 모래주머니가 있고 지방질도 두껍게 허리에 꿰차고 있어 날아가지 않는다. 곧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나 각종 모임에 관심을 갖고 참석하는 자들이다. 가정에서 핍박이 있어도 그 닭들은 날아가지 않는다. 대외적으로 예수쟁이라는 언짢은 비웃음이 있어도 그 닭들은 떠나지 않는다.
사실 이들은 성령충만하여 능력을 맛본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자들이다. 하늘의 기사와 땅의 이적이 함께 하는 자들이다.
여러분은 황새인가 닭인가? 여러분의 자녀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