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자
천지만물 중 사자는 시무언에게 무엇일까? 성경을 열심히 읽은 사람이라면 그 예상대로 마귀가 될 것이다. 시무언은 사자에게서 마귀 혹은 사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원수’를 이끌어낸다. 사단이나 마귀를 영어로는 the Satan/세이튼/과 the devil/데블/로 부른다. 시무언은 헬라어로 “호 사타나스,” “호 디아볼로스”라며 헬라어 ‘호’가 관사로서 “그 마귀,” “그 사단”으로 어떤 대상을 특정한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어떤 학자는 마귀(魔鬼)를 한자로 재미있게 풀어 설명하기를, 마(魔)에 나무 두 개가 들어가니 두 개의 나무 사이 아래에 있는 귀신이라 한다. 영적 세계를 모르니 귀신과 같은 부류로 귀신 중의 왕 같은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나무란 하나는 선악과나무, 다른 하나는 생명과나무라고 하니 평소 이간질하는 그의 속성을 간파한 점에서는 흥미로운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신약성경은 사자에 관해 두 번 언급한다.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 잡혀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처럼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은 경우가 디모데후서와 히브리서에 나온다. 또 다른 언급은 며칠을 먹지 못해 굶주린 맹수, 곧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것을 찾는” 경우로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나온다. 대적과 원수는 뜻이 다르지 않다.
그 다음 절을 보면 “너희 믿음을 굳게 하라. 마귀를 대적하라”는 두 개의 명령문이 나오는데, 신앙인이 원수로 삼고 대적해야 할 대상이 사람이나 다른 생물이 아닌 마귀라는 것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마귀가 원수라는 것은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왜 성경은 이를 강조할까? 왜 시무언은 이 구절과 함께 그렇게 “마귀를 대적하라”는 부흥회까지 하셨을까?
본래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노예가 되어 마귀의 일을 돕고 하나님을 대항했기 때문이다. 죄에 팔려 사망이 왕노릇하는 인생이 세인들의 삶 아닌가. 생명을 천히 여기고 자살로 유도하는 마귀의 유혹들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를 팔고 죽였듯이 지금도 거룩한 피를 흘리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인생이 역전되는데, 바로 예수의 피를 힘입은 후부터다. 보혈의 공로를 체험한 후에는 우리 원수가 바로 마귀임을 직시한다.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역사를 일군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적 존재여서 어느 편이든 한 편과는 영원한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 한 편이 마귀이든 아니면 하나님이든 말이다. 이처럼 성경은 원수를 말한다. 성경은 원수가 있고 그 원수를 대적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종교는 원수를 말하지 않는다. 종교에는 원수가 없으니 원수를 대적하라는 말도 없다. 아니 대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는 곳도 있다. 성경은 결코 사람을 원수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는 사자 곧 마귀다. 그러나 종교에는 원수가 없고 원수를 말하지 않으니 신앙인이라도 종교적 신앙인은 원수를 모른다.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없는 영원한 원수가 있다. 성경은 영원히 대적해야 할 대상이 있음을 잊지 말라 한다. “사단”이란 원수란 뜻으로 하나님의 원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원수라면 우리에게도 영원한 원수이다. 당신 앞에 대적할 ‘사자’가 있는가? 우리 모두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 영원한 원수인 마귀를 대적하자.
출처: 내평생에 1권